[중앙일보] [시론/김용희]‘일하는 실버’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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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김용희]‘일하는 실버’가 아름답다
‘007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뇌쇄적인 ‘본드걸’들에 비해 007의 비서는 너무 뚱뚱하고 나이 든 할머니라는 점이다. 1970, 80년대 당시 한국 영화가 젊은 여비서와 사장의 추문을 흔한 소재로 삼던 것을 상기한다면 나에게 007영화에서 나이 든 할머니 비서는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능숙하고 노련했다.
외국 영화에서 고급스럽고 전통 깊은 레스토랑의 웨이터는 언제나 정복을 입은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젊고 멋진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연륜이 필요했던 것일까. 백발의 웨이터는 레스토랑에서 반평생을 보내면서 수많은 남녀 사랑의 풍경을 지켜본다. 어쩌면 그는 사랑이 피어나고 스러져 가던, 그 모든 인생에서의 비밀들을 이미 알고 있는 자일지도 모른다.
한국 자본주의의 팽창 속도와 진행에 대해 수입된 근대니 파행적 자본주의니 우려의 말들을 하고 있지만, 속도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한국민과 자본주의 생리는 아주 잘 맞는, 일치점이 있다. 좋은 헌것보다 나쁜 새것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더 새롭고 더 젊고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된다. 10대 ‘아이돌’ 스타가 하룻밤을 자고 나면 공장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제품처럼 출시되곤 한다. 열광이 일다 스러지면 또 다른 제품이 차세대로 준비된다. 한국이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감지하면서도 더 어리고 더 새로운 자극을 찾는 추세는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정보기술(IT) 선진국이라는 점에서도 한국은 젊은이들의 상상력과 첨단의 아이디어를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전직 학장, 최고경영자(CEO) 출신, 경찰서장 출신의 70대 노인들이 ‘유쾌한 취업 반란’을 도모해 화제가 되고 있다. 70세 이상의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공모에서 ‘궁·능 관람 안내 지도위원’으로 10명이 선발된 것이다. 우선 전문직 출신 고령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냈다는 것이 시사점을 던져 준다. 체력을 관리하면서 나이가 들어도 꾸준히 외국어 학습과 독서를 계속해 왔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한국에는 ‘뒷방 늙은이’ ‘현대판 고려장’ 같은 노인 폄훼의 말도 있지만 ‘장유유서’와 같은 아름다운 전통의 뿌리가 깊은 것도 사실이다. 사실 장유유서에는 두 얼굴이 있다. 하나는 연장자를 배려하고 대접하는 아름다운 미덕이다. 하지만 장유유서가 보수성과 권위 의식으로 퇴행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고 그런 경우 이 가치가 결과적으로 노인들을 현장에서 배제하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아시아적 전통이 민주화에 방해가 된다는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 일어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사적인 영역에서의 장유유서와 공적인 영역에서의 직무의 엄정함은 반드시 구분돼야 한다. 두 가치의 평화로운 공존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 생산 활동은 철저하게 노동정신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음식점에서 서빙하는 백발의 노인은 젊은 손님의 요구사항을 ‘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의 노인들은 유교적 가치관을 습득하면서 살아 온 세대이며 근대화 초기의 역군이다. 그들은 지금도 급변하는 사회에서 현장의 역군으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전관예우를 요구하기보다 퇴직 후 신생(新生)의 심정으로 새 일자리에 임하는 프로의식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전문직 고령자뿐만 아니라 일반 노인 취업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어쩌면 한국 산업화를 이끈 이들의 끈질긴 집념과 성실함이 손쉽게 재화 획득을 하려는 우리 사회의 경박함에 의표를 찌르고 있는지도 모른다./(06/2/18)
출처:동아일보(2006.2.18) / 시론. 김용희 평택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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